맹정현,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09), 3부 3-4장, 들뢰즈 비판
* 2011년 11월 25일 트위터(@armdown)로 했던 브리핑을 보기 편하게 정리했습니다.
철학자의 개념은 설령 같은 어휘라도 서로 다른 뜻이다. 가령 들뢰즈의 real은 라캉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들뢰즈의 real은 '실재'가 아니라 '현실'이다. 라캉의 '실재'는 '상상' 및 '상징'와, 들뢰즈의 '현실'은 '잠재' 및 '현행'과 짝을 이룬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모두 '실체'라는 말을 쓰지만, 이 둘에게 그 개념이 지칭하는 바는 천양지차이다. 논쟁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개념이 같아야 하는데, 이렇듯 철학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지껄이기에, 대개 논쟁은 성립조차 안 된다.
오늘 브리핑으로 맹정현 박사의 저서 <리비돌로지>(2009) 중 3부 3-4장을 검토하려 했었는데, 막상 다시 읽어가다 보니까 라캉과 들뢰즈의 언어가 너무 달라 망설이게 되었다. 그래서 들뢰즈는 논쟁을 피하려 애썼던 것이리라.
들뢰즈가 프로이트나 라캉을 비판했다면, 필경 이들의 언술이 인간적 은유들(아버지, 거세, 오이디푸스, 남근 등)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리라. 욕망과 무의식은 인간적인 것과 아무 상관 없으며, 인간적인 것 바깥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상징계 자체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로 불가능성의 수준에 자리 잡는 '성적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실재로서의 성적 차이를 어떻게 주체화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실재를 주체화하는 데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또 다른 '성적 차이'가 있다. 즉 남근 지향적 남성(혹은 여성)과 타자 지향적 여성의 차이가 있다. 성적 차이가 무의식 속에 기록될 수 없다고 한다면, 여성 또한 무의식 속에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하나'의 성과 '타자'의 성, '같은 것'으로 회귀할 수 있는 동일자의 성인 남성과 항상 '다른 것'으로 분산되는 타자의 성으로서의 여성이 있으며, 이 둘의 성적 차이는 애초에 불가능성의 수준에서 상정되었던 성적 차이를 배가시킨다. 성의 조합이나 다중적 양태들로는 환원될 수 없는 본원적 간극을 여성의 '비존재'라는 간극으로 배가시키는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 이중의 간극으로부터 시작해 실재를 향해 정신분석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맹정현 340)
맹정현으로부터의 이 긴 인용(340쪽)은, 최소한 '성'에 대한 두 규정 방식의 차이에서 '남성'과 '여성'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왜 (인간적인) '남성'과 '여성'으로 지칭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맹정현은 "성적 차이는 어떤 해부학적 기관의 존재/부재에 의해 결정되거나 신체의 외양이나 이미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338)라고 말하지만, 최소한 담론 전개만 보면 '남근'과 '거세'가 그 구분에서 중요한 기능을 함을 알 수 있다(339). 성적 차이는 "불가능성의 수준, 실재의 수준"에(338), 즉 '상징계' 또는 '언어의 질서'를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는 건데, 들뢰즈라면 성은 존재의 생산으로, 현실의 생산의 경과를 가리킨다. 모든 것은 현실이며, 현실은 현행과 잠재의 상호 운동이다. "라캉에게 주체는 이론과 실천의 출발점이다."(맹정현 342) 이 말이야말로 라캉이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고 논의를 개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어 또한 라캉의 논의의 중심에 있다(상징계, 기표, 기의, 의미화 등은 모두 언어를 세분한 것들이다). 언어는 인간적 현상이며, 언어를 둘러싼 타자와의 거리 내지 차이가 라캉 정신분석을 추동하는 힘이다. 언어(langue)건 언어활동(langage)이건 간에, 그것은 인간에 고유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진정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주체 없는 기관들의 욕망(혹은 "기관 없는 신체"의 욕망)과 기관이 아닌 주체의 욕망 사이에서 욕망의 분석은 과연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 욕망은 기계일까 주체일까?"(맹정현 342) 최소한 맹정현이 요약한 뒤의 물음은 정확하다. 들뢰즈는 욕망을 기계라고 본다. 그러나 기계는 우주이다. 물음을 바꾼다면 이러하다. 인간이 먼저일까 우주가 먼저일까? 인간학이 우선일까 존재론이 우선일까? 신학인가 자연학인가? 최소한 국내에서 라캉 연구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맹정현의 설명에 따라, 라캉이 생각하는 욕망이 인간적 욕망임을 보여주는 대목들 몇을 적어 보기로 한다. 이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이 라캉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분열분석의 지향 또는 목표에 관해 : "그것은 무엇보다 모든 욕망의 기저에 잠재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욕망의 혁명적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망하는 기계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맹정현 343)
방금 진술에 등장하는 '욕망하는 기계들'과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맹정현의 번역은 오역에 해당한다. '욕망(적) 기계들' 및 '생산적 (특성을 지니는) 욕망'이 더 정확하다. 최소한 의미상으론 그러하다.
욕망기계의 본성을 되찾기 위한 인식론적 작업에 관해: "주안점은 주체에게 반욕망이 투자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일에 놓인다."(맹 344) 그러나 들뢰즈에게 '반욕망'이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성립하지도 않는다. 맹정현은 앞 문장에 이어 "이러한 인식론적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어떻게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욕망이 자기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도록 결정될 수 있는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AO 124]."라고 부연하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즉 주체가 반욕망을 욕망하는 지점, 주체의 욕망이 반욕망으로 반동적으로 굴절되는 지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맹정현 344)
맹정현은 '반욕망'을 '욕망이 자신을 억누르는 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소한 들뢰즈에게 '반욕망'은 없다. (많은 논자들이 이해하는 식의) '욕망의 자기 억압'이란 표현도 적절치 않다. 이 때의 억압이란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억압이 아니며, 더 깊은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나중에 설명드리겠다. :)
"어떻게 지식이 자신이 아닌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분열분석가의 인식론적 작업, 욕망의 기관에 대한 조망이 신경증 환자의 '치료'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신경증 환자로 하여금 욕망의 본성을 되찾도록 할 수 있을까?"(맹정현 344)
맹정현의 질문들은 (뒤에도 나오겠지만), 1)들뢰즈의 작업을 '인식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2) 환자의 '치료'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내가 인식하는데 어떻게 타자가 변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러한 위치 설정의 전제는 지식이 곧바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요컨대 욕망의 장 속에서 전이 과정 없이 지식을 전수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맹정현 344)
맹정현이 이해하는 '실재'(즉 현실): "실재를 생산하는 힘(생산력)으로 규정하면서,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이 애써 벗어나려고 했던 동력학적 자연주의로의 회귀를 도모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귀의 대가는 욕망, 무의식, 충동을 뒤섞어버리는 것이다."(345) 이러한 이해는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일차적 관점은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나아가 니체, 스피노자, 마르크스를 따르는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하겠다. 비판조의 어조를 뺀다면.
들뢰즈와 라캉의 용어상의 차이와 관해: "라캉이 개념으로 구분한 것을 저자들은 하나의 용어로 통합한 다음 그 용어의 용법의 차이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346) 욕망과 충동의 구분(라캉)을 욕망의 용법 차이로 바꿨다(들뢰즈&과타리)는 말. 이는 사소한 차이가 아닌데, "개념의 차이를 용법의 차이로 옮겨놓음으로써 ...표면적으로 유사한 실천 목표를 수립하면서도 결국 그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전혀 다른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346)이다. 이 문장에 이어 중요한 발언이 나온다.
"어떤 점에서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의 실천적 목표는 매우 흡사하다. 정신분석이 겨냥하는 바가 환상에 의해 지탱되는 욕망을 환상으로부터 떼어내 충동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분열분석은 반생산적 욕망을 생산적 욕망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문제는 바로 '어떻게'이다. 결국 양자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은 목표의 수준에서라기보다는 실천적 전략의 수준에서이다. 양자의 전략은 전혀 다른 전제를 상정하며 결국 전혀 다른 윤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목표의 동일성과 전략의 차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반생산적 욕망'이란 표현은 적합치 않다. "욕망은 그 자체로 생산적인 것이다. 심지어 욕망이 반생산으로 귀착할 때조차도 그것은 반생산의 생산으로 간주된다."(347)고 언급하더라도.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결국 욕망의 힘이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욕망은 그것의 모든 부정적 용법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 반생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그 욕망의 본성 속에 있다는 동력학적 관점의 낙관적 믿음이 전이를 고려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힘 자체의 본성에 귀의함으로써 신경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고려될 수 있는 전이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 물음: "하지만 과연 실천을 통해 변화시켜야 할 현실이 욕망의 현실인 경우에, 게다가 그 욕망의 현실이 타자의 욕망과 연루되어 있는 경우에, 과연 그 믿음이 신경증자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맹정현 348)
여기까지 진술에서 보이듯, 맹정현은 현실과 욕망을 철저히 인간적 수준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사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현실과 욕망은 철저히 비인간적 수준에 존재한다. 최소한 일차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중심주의 우주관을 벗어나는 일이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맹정현은 AO 371을 인용하며 호전적 비판을 예시한 후(그런데 사실 이 대목은 부정적 비판의 임무를 소개하는 곳으로, 긍정적-적극적 임무는 뒤에 이어진다, 암튼), 논평한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호전성이 전이를 개입시키지 않고 '지식'과 '비판'을 곧바로 접속시키는 데서 비롯된 한 가지 이론적인 징후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분열분석의 호전적 외관은 '지식'과 '비판'의 직접적 접속이 주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유래한다. 결국 그것은 '비판'이란 용어가 갖는 전통적 의미를 그대로 보존할 수밖에 없다. '비판자'와 '비판받는 것'의 거리가 그대로 유지되고 지식이 아무런 매개도 없이 자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맹정현 349) 조금 뒤에, "결국 지식을 실천으로 변형시켜야 하는 지점에서 분열분석은 일종의 '견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맹 349) 즉 분열분석은 "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이론"(350)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정현의 이런 지적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작업을 인식론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다. 허나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그렇듯 윤리학의 출발점은 존재론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인간주의적 윤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하면 나오게 되는 물음. "하지만 신경증자들이 그러한 모방을 통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350) 그래서 정신분석적 실천이 필요하다. "정신분석 실천은 그러한 주체와 증상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출발한다."(350)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이는 '지식'으로부터 '주체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이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다."(350) 계속: "전이는 환자의 리비도적 구조를 정신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현재화하는 정신분석의 핵심적인 축이다. 바로 이러한 현재화 없이 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은 불가능한 것이다."(맹 350-1). 반면 DG는 이런 전이를 '사제 권력'의 행사로 본다.
"정신분석가는 주체의 대상 a 자체가 될 수 없으며, 다만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대상 a에 대해 다른 포지션을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 잠시 그것의 자리를 빌릴 뿐이다. 이를 통해 분석이 수행하는 작업은 오이디푸스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에 의해 지탱되는 환상을 관통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분석은 상상적 시나리오에 의해 포장되어 있는 대상 a를 추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이 "전이 하의 임상"이며 분열분석과 같은 비판적 실천이 아닌 이유이다."(맹정현 351-2)
"어떤 면에서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은 모두 '실재'를 향해 나아가며 그런 점에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이 하의 실천'이냐 '전이 밖의 실천'이냐는 문제는 양자가 실재에 대해 취하고 있는 윤리적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352) 논평: 그러나 이를 거꾸로 보면 전이 하의 실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쟁점에 관련되며, 전이 하의 실천이 결국 고도의 사제 권력 행사라는 비판은 유효.
다시 이에 대해 이런 비판이 뒤잇는다: "정치적으로 실재의 급진성에 매달린 분열분석은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 '정상성'과 '병리성'의 변증법 속에서 주인의 욕망으로 나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맹정현 352) 이어 "그것은 '반동적 병리성'을 '비판받는 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것을 치유하기보다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자신에게는 '혁명에 대한 욕망'이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주인의 욕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맹정현 352)
"몽상가가 아닌 임상가로서 라캉"은 "신경증자가 머뭇거리면서 선택했을 바로 그 실재의 언저리를 더듬으면서 그에게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병리성은 그것이 '비판'이라는 초월적 시선에 의해 허구적인 것이라고 폭로된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맹정현 353) 문단 바꾸어: "병리성은 좀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병리성을 지탱하는 믿음과 신앙은 맹목적인 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 믿음과 신앙의 일부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 맹목적인 귀는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라캉의 출구가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출구로부터 시작해 역으로 입구 쪽으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맹정현 353) 이것이 3부 4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단에서 '그 믿음과 신앙의 일부가 되어준다'는 표현에 유의.
바로 이 표현이 들뢰즈와 과타리가 사제 권력 또는 신학의 실천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전이'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맹정현은 좋은 학자다(브루스 핑크 번역도 훌륭하다). 라캉의 외줄을 타는 것이 유감일 뿐. 오늘 브리핑 끝.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보니, 인간주의의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군요....남성/여성/오디푸스, 무의식의 언어화 등등. 인간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우주론적 존재론, 그리고 그 존재론에 근거한 인식론을 다시 세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구요. 라깡을 읽을 때 마다 미로를 헤메는 듯한 몽롱한 기분,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를 어느 정도 이해했을 때 부터 느껴지던 샘솟는 듯한 힘, 그 차이의 전모가 잘 드러난 듯 합니다.
얼마전 선생님의 트위터에서 DeLanda에 대한 제 인상평을 하면서, 그는 과학의 언어를 빌려 들뢰즈를 사회과학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발언을 취소해야 할 것 갑습니다. 사실 그때는 A New Philosophy of Society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책이 제가 처음 접한 DeLanda 의 책이었거든요. 얼마전 부터 그의 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란 책을 읽고 있는데, 생각이 바뀌네요. 이 책은 수 많은 수학과 과학 (특히 생물학과 약간의 물리학)의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를 친절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풀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사회과학 책이란 기분은 전혀 들지 않고, 그렇다고 철학책이라고 하기도 애매모호 하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정보공학과 수학 그리고 통계에 익숙한 비철학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정보시스템 하는 사람들도 몇몇 대가들 빼고는 이런 류의 책을 거의 안 읽죠 ^^). 저의 경우 앙띠 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너무너무 힘들게 읽었고, 그 의미도 가물가물했는데, DeLanda의 책을 읽다보니, 그 의미들이 어떤 해설서들 보다 실감있게 다가 오더라구요. 아마, 그가 사용하는 많은 수학, 통계, 생물학, 그리고 물리학의 예들이 제 전공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이진경 교수의 해설과는 질적으로 다르구요). DeLanda의 글을 읽다가 선생님께 저의 변한 느낌을 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자 남기고 갑니다.
이런 류의 짧은 논평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네요. 좋은 활동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