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획을 하나 마련하려 합니다.
이름하여 '들뢰즈에게 궁금한 것들' 또는 '따지고 싶은' 것들입니다.
알려 하면 할수록 더 궁금해지는, 더 어려워지는 들뢰즈.
물론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예외.
그러니, 정말 궁금한 사람들만 모여 문답을 해 보도록 하지요.
아래 댓글에 이어가는 형태로 진행합니다.
별로 생각해 보지 않고서 툭 던지는 질문에는 그 정도 수준의 답글이 달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고민과 생각과 궁금함을 가득 담아 질문에 임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펠릭스 가타리의 '횡단성 계수'(coefficients de transversalite) 개념:
"살을 에는 듯한 어느 겨울날, 일단의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견디고자 서로 몸을 껴안아 따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너무 아파 그들은 곧 다시 흩어졌다. 그러나 추위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가까이 모였고 다시 한 번 찔려서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두 악(惡)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주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기까지 이렇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계속되었다."(<정신분석과 횡단성>, 국역 145-6)
경험론의 비밀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글. 들뢰즈는 흄 및 '제도의 설립'과 관련해서 비슷한 비유(배를 젓는 사람들)를 언급한다. 법/법칙(loi)은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실험'을 강조하는 경험론의 모토라 하겠다.
'기계적 무의식' 개념
"집단적 하부구조들는 미디어나 광고와 마찬가지로 주관적 삶의 가장 내밀한 수준들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무의식은 ... 단지 기계적 상호작용의 리좀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 체계들 및 권력 관계들과의 연결이다. 그렇기에 무의식적 과정들은 특유한 내용이나 구조적 구문의 견지에서 분석될 수 없고, 오히려 언표행위, 집단적 언표행위 배치체들의 견지에서 분석될 수 있는데, 정의상 그것들은 생물학적 개인들이나 구조적 계열체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이 배치체들에 의해 탄생된 무의식적 주체성은 '기성품'이 아니다. 이 무의식적 주체성은 열린 배열형태들에 따라, 서로 매우 다른 질서들(기호들, 비물체적 우주, 에너지, '기계권(機械圈)' 등) 안에, 그것의 독자화의 과정들을, 그것의 주체적 집합(ensemble)을 위치시킨다."(Guattari, "심리학적 무의식을 넘어서(Beyond the Psychological Unconscious)": 199)
가타리의 이 발언은 무의식을 심리학적인 것 바깥으로 확장한다는, 아니 차라리 심리학 바깥에서 심리학(마음)의 형성 조건을 찾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인간 몸에 고유한, 그리고 인간 마음에 고유한 비인간성이 있다. 동물과의 동물적 관계들이 있다."(Deleuze, ABC, "A")
그렇지만 동시에 이 동물성은, 괴물성, 나아가 물질성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비인간성의 의미이다. 동물성, 괴물성, 물질성은 비인간성을 위해 지나가야만 하는 경유지이다.
우노 구니이치의 "안티 오이디푸스" 일역판 후기 중에서 주목할 만한 평가 몇 가지...
"이 책이 단지 가족이나 성이나 자아를 해체해 욕망에 따라 살자 따위의 주장을 했다면,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것도 공감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다. 저자들도 실제로는 그런 “삶의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족이나 성이나 자아를 구성하는 무수한 분자에 주의를 돌려 뭔가 다른 형태의 가족이나 성이나 자아를 살아가, 각각의 분자 사이에 별도의 결합과 공명을 발견하는 것들 자체를 “혁명”으로 제안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영원한 과제이고, 지금도 전적으로 현실적인 혁명적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욕망이 ‘혁명적’인 까닭은, 욕망이 거칠어서[荒]가 아니라, 의식으로는 이끌 수 없는 미세한 미지의 파동과 흐름의 선[流線]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문제에 답하려 하면서, 동시대를 멀찍이 넘어선 전망 속에 문제를 위치시키고 답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특징이다. (...) 확실히 그것은 정신분석의 영역을 한참 넘어서는 문제 제기 속에서 정신분석을 문제로 삼을 뿐이다."
"사고하도록 강요하는 것, 그것이 기호이다. 기호는 만남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만남이 사고하도록 제공하는 것의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바로 정확히는 그 만남의 우발성(la contingence de la rencontre)이다."(PS 118)
"만남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 사고되는 것의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바로 만남의 우연이다."(PS 25)
"Should we keep the semiotic productions of the mass media, informatics, telematics and robotics separate from psychological subjectivity? I don’t think so. Just as social machines can be grouped under the general title of Collective Equipment, technological machines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operate at the heart of human subjectivity, not only within its memory and intelligence, but within its sensibility, affects and unconscious fantasms. Recognition of these machinic dimensions of subjectivation leads us to insist, in our attempt at redefinition, on the heterogeneity of the components leading to 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p. 4)".
Guattari 의 Chaosmosis: An Ethico-Aesthetic Paradigm (1995)에서
이 인용문에서 가따리가 사용하는 "social machine" 혹은 "collective equipment" 등의 용어를 보면, 일반적인 추상기계의 수준을 넘어, 정보공학, 매스 미디어, 텔레마틱스, 로봇틱스 등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물질적 조건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이 생산되는 과정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같다. 오피스 책상 위에 고정된 데스크탑 컴퓨터 모델을 넘어, 모빌 스마트 폰과 소셜미디어 (패이스북 혹은 트위터 등)를 통해 항상 무엇인가를 (기계든 사람이든 간에) 향해 연결된 인간조건을 볼 때, 우리 인간은 사이보그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 아이디라는 가상의 물질적인 아이덴티티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수한 인간끼리 소통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는 social machine 그리고 collective machine에 대한 나의 확대 해석일까? 기계를 통해 접속된 수많은 인간들이 비인간적인 기계의 힘을 빌어 만들어 내는 collective intelligence는 순수 인간의 intelligence 와 비교해 무엇이 어떻게 다른걸까? 정도상의 차이를 뛰어넘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걸까? 그리고 이 테크놀러지를 둘러 싸고 어떤 형태의 조직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님의 의문들은 사실 의문이 아니라 답이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아를 중심에 놓지 않고 주체 내지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들뢰즈, 가타리의 작업이었지요. 우리는 주체에 관한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만 합니다. 푸코가 매달렸던 작업도 그런 것이었고요. 현대의 기술기계의 발전과 관련한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주제는 들뢰즈 가타리 공동 작업의 핵심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collective equipment라는 표현은 collective assemblage(=agencement) 형태로 빈번히 등장하며, social machine이란 표현은 기본 개념 또는 중심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의 용어들은 들뢰즈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식은 객관 실체와 주관 실체 사이의 관련이 아니라, 하나는 객관의 영역에 있고 다른 하나는 주관의 영역에 있는 그 두 관계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은 두 관계들 사이의 관계가 그 자체로 하나의 관계라는 것이다."(G. Simondon, 2005, p. 83) - 김재희, "물질과 생성: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제93집, 철학연구회, 2011 여름, pp. 254-5에서 재인용.
이 문장에서 "두 관계들"이라는 표현이 궁금하다. 앞에 원서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으나, 흥미로운 발언이다.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철저하게 비인간주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곧, 욕망이란 우주론적 존재론적 개념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은 바로 이 '욕망의 존재론'이 개진되는 자리이다. 헤겔, 프로이트, 라캉 등의 욕망 이론과 갈리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이들에게 욕망은 '인간적 욕망'일 뿐이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인간이 바로 '욕망'의 특정한 조건에서의 구성물이다. 따라서 '인간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는 철저히 진단적 맥락에서 그럴 뿐이다.
불어로 machine desirante, 영어로 desiring-machine으로 표현되는 말의 바른 한국어 번역은 '욕망적 기계', 약칭 '욕망 기계'이다. 이를 '욕망하는 기계'로 옮기는 순간 오류에 빠져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들뢰즈에게 '욕망적 기계'와 '기계적 욕망'은 같은 뜻이며, '욕망=기계'의 동일성에 대한 양면적 표현이다.
욕망의 해방에 관한 물음 또한 거짓 물음이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욕망의 해방'이란 말에서 '욕망'은 '인간의 욕망'일 뿐이며, 현대 사회라는 특정한 조건에서 형성된 존재인 현대인의 욕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욕망의 해방은 일차적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계열(series)'은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항들의 만남을 통해 성립하지 않는다. 계열은 그 자체가 운동이며, 시간의 경로이다. 계열은 곧 '연결(connexion)'이다. (이정우, 이진경 등에 의해 소개된 '계열화'라는 용어는 들뢰즈의 '개념'이 아니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도 그 용어를 딱 한 번, 그것도 소제목에서 쓰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베르그손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항상 공간의 견지가 아니라 시간의 견지에서 생각하라. 최소한 70년 이후의 들뢰즈의 작업은 철저히 시간의 견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간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단지 2차적으로만 그런 것일 뿐이다.
불어권에서 아주 괜찮은 들뢰즈 입문서가 나왔다. 조금 압축적이어서 일반 독자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종횡무진 오가면서 개념을 정리해 놓은 책으로, 분량도 짧다. 저자는 아직 박사는 아니다.
이 책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들뢰즈가 다른 고전 철학자(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처럼 다뤄지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일독이 끝났다는 얘기. 이제 조금 있으면, 그 성과가 영어권과 다른 나라로 전파될 것이다. 들뢰즈 연구 및 사용의 새 마당이 열리고 있다.
얄궂겠지만, 어떤 책인지는 최근에 나온 불어권 책을 몇 권 뒤적여 보면 알 수 있을 터이므로, 저자는 생략.
"On distingue troit synthèse: la connective (si/alors) qui construit une série ; la conjontive (et) qui construit les séries convergentes ; la disjonctive (ou bien) qui répartit les séries divergentes."(Logique du sens, 203)
"La machine désirante n'est pas une métaphore. Elle est ce qui coupe et est coupé suivant trois modes. Le premier renvoie à la synthèse connective et mobilise la libido comme energie de prélèvement [et ... et puis] ; le seconde à la synthèse disjonctive et mobilise le numen comme enérgie de détachement [soit ... soit] ; le troisieme, à la synthèse conjonctive et à la voluptas comme enérgie résiduelle [c'est donc ...]."(Anti-Oedipe, 90)
요점은 "의미의 논리"(1969) 시절의 종합 이론이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 와서 완전히 개비되었다는 것, 나아가 이 개비는 끝까지 유지되었다는 것.
빌라니(Arnaud Villani)는 이 변화를, '의미(sens)'의 문제에서 '사용(usage)'의 문제로의 변화라고 해석(p. 320). 그렇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언어(내지 인간)'의 문제에서 '존재'의 문제로의 전환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봄. 말하자면, 사회-정치 철학 차원에서 인간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라고 볼 수 있겠음. 따라서 이후의 과제는 인간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모든 기존 철학과 결별하고, 존재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내재성의 존재론 또는 새로운 인간학의 구성이 될 수밖에 없음.
여기서 새로운 인간학이란 새로운 주체성인 '집단 주체성'의 문제로 수렴됨. 과타리가 제기한 '예속 집단'과 '주체 집단' 간의 구분, 그리고 후자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 이 문제를 니체나 카프카를 이어 받아 DG는 '새로운 민족(Volk, peuple)' 또는 '도래할 민족'의 문제로 표현. 물론 이 때의 민족은 인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소수자 집단으로 이해되어야 함. 대략 "천 개의 고원" 둘째 고원에 나오는 masse(군중)와 meute(무리)의 구분 중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됨.
욕망, 사회체, 집단.
실천은 집단의 성격을 바꾸려는 노력에 제한. 네트워크 효과 발생 유도. 단, 실천은 의식의 영역을 초과하며, 무의식적 실천 및 그에 대한 분석이 병행되어야 함. 분열-분석.
인간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물론 더 탐구해야 한다. 아마 우주 끝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Liberated desire means desire that escapes the impasse of private fantasy: it is not a question of adapting it, socialising it, disciplining it, but of plugging it in in such a way that its process not be interrupted in the social body, and that its expression be collective. What counts is not the authoritarian unification, but rather a sort of infinite spreading: desire in the schools, the factories, the neighbourhoods, the nursery schools, the prisons, etc. It is not a question directing, of totalising, but of plugging into the same plan of oscillation. As long as one alternates between the impotent sopntaneity of anarchy and the bureaucratic and hierarchic coding of a party organisation, there is no liberation of desire."(F. Guattari, CY, 62)
욕망의 해방과 욕망의 감금이라는 이율배반적 사태가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답의 모색 과정에서 욕망을 최종심급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즉 비재현적 존재로 본다면, 욕망 외부의 조정자 내지 통제자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타리의 지적처럼, "욕망의 해방을 위해 당이나 국가장치에 의존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어라."(CY 62)
"들뢰즈&과타리에게 '혁명은 어디서 올 것인가?'와 '혁명은 어떻게 배반당할 것인가?'라는 두 물음은 궁극적으로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이다."(Buchanan, 2008, 12)
"그들[들뢰즈&과타리]의 잦은 반-개량주의적 언급들은 [1960년대 당시의] 프랑스공산당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Buchanan, 16)
프랑스 공산당은 68년 5월 상황에서, 특히 알제리전쟁, 베트남전쟁, 미 제국주의 세계화 앞에서 무기력하기 그지없었기에.
김재인: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만남은 좋은 궁합일 경우 힘이 증가하고 나쁜 궁합일 경우 힘이 감소한다. 궁합을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다. 일단 만나 봐야 확인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는 이렇게 성립한다.
물음: 애초에 좋은 궁합이라서 힘이 증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힘이 증가하기 때문에 좋은 궁합이 되는 것일까요?
김재인: 힘이 증가하기 때문에 좋은 궁합이고, 기쁨을 가져옵니다. 다만, 그걸 미리(선험적으로, 즉 만나기 전까지, "애초에") 알 도리는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경험 즉 실험이 필요하게 됩니다. 예술가의 실험과 꼭 같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음: 제가 궁금한건... 원래부터 좋은 것인데 마주치기 전에는 미리 알 수 없다는 의미인지, 원래부터 좋고 나쁨이란 없는 것인데 마주친 이후에 기쁨의 증가로 인해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인지요...? ("좋은" 그 자체의 선험성?)
김재인: 원래부터 좋다는 건, 만남의 각 항으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에 관해 지칭되는 표현일 텐데, 만남 이전에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니 '원래'라는 말을 말 수 없겠지요. 독도 어떤 병엔 약이 됩니다. 나아가 "좋음"은 선험적이지 않은 것이, 만남을 통해 형성된 새 관계체('몸')가 파괴되거나 힘을 잃을 경우 그것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거겠고, 강해질 경우 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좋음과 나쁨은 개념 정의와 관련되지요.
물음: 알아들었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
(어제 트위터에서의 문답)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하여 옮깁니다. 출전: http://blog.hani.co.kr/differ1a1nce/38399
<앙띠 오이디푸스> 읽기1 낙서장 2011/03/17 12:40 http://blog.hani.co.kr/differ1a1nce/38399 ![]()
니체: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아침놀 173)
이러한 니체의 노동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같다.
DG의 오이디푸스와 정신분석 비판의 가장 핵심은 욕망과 무의식, 또는 성(성욕)과 생산의 모델로 "아빠-엄마-나" 관계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무의식이 고아라는 되풀이되는 발언은, 무의식(욕망, 성...)이 '독생자'라는 존재론 전체를 마주한 도발이다. 무의식과 욕망이 독생자라는 말은, 철학사적으로는 스피노자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 즉 자연, 니체의 권력의지의 영원회귀에 닿아 있으며,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의 유일한 계승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적 자본이란 형용모순인데,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자본은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즉, 망한다는 얘기다. 그럼 잉여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 오직 인간 노동에서! Q.E.D. 마지막 물음: 잉여가치는 오직 인간 노동에서만 나오는가? 극한 질문!
"헤겔에게 철학적으로 육화되어 있는 것은, 삶에 '짐을 지우'려는, 삶을 모든 짐들로 압도하려는, 삶을 국가 및 종교와 화해시키려는, 삶에 죽음을 새기려는 기도 - 삶을 부정성에 굴복시키려는 괴물같은 기도, 원한과 불행한 의식의 기도다."(ID 144e)
철학은 생각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쟁이다. 사실 그건 모든 창조적 작업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생각은 끊임없이 갱신되지 않으면 썩는다. 그 후엔 좀비로 연명하고. 허나 생각은 삶이 만드는 거다. 사는 만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게 아니라 세상이 우릴 바꾸는것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도가니) 꼭 영화를 봐야 깨닫나? 난 다시 쓴다. "우리는 지금 세상이 우리를 바꾸는 것을 막음으로써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거다."
"지능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인 무엇이며, 지능은 사회적인 것에서 매개항을, 즉 지능을 가능케 하는 제3항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 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기에 밤이며, 점심 때기에 우리는 먹는다."(ID 21e)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은 모든 가능한 나타남의 형식이며, 우리의 직관 내지 우리의 감성의 순수한 형식들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은 이번엔 제시(presentations), 선험적 제시이다."(PCK 8e)
인식론은 항상 인식 주체로서의 우리와 인식 객체를 설정하며 시작한다. 만일 이 주객 분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칸트가 설명한 저 시공간은 '선험적'일 수는 있겠으나 경험의 '형식'일 수는 없으리라. 그것은 차라리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형식 아닐까?
하나 덧붙인다면, 공간보다는 시간이 우선인데 이는 시간이 내감의 형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즉자 존재의 형식으로, 이를 내공이라 지칭할 수 있으리라.
들뢰즈에서 corps(물체 또는 몸)의 정의는 서로 긴밀히 상호 참조되는 두 출처를 갖는데, 하나는 스피노자고 다른 하나는 니체다. NP 2장을 따르면 몸이란 '힘들의 관계'를 뜻하는데, SPP는 몸이 '합성과 분해'의 와중에 있다고 부연한다.
"사고란 위상학적 예술이다, 즉 물체(몸)들이 서로 충돌해서 땅을 상이한 영역들로 구획하는 장소들에 대한 지리학적 지칭이다."(Aldo Pardi, 2009, 66)
"실체는 자신의 생산력 안에서 살아가는 탈구된 공장이며, 생산은 실체의 생성의 특유한 형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A. Pardi, 68)
위의 두 구절은 Pardi한테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대목.
A. Pardi는 Marxian revolution을 "each historical formation is a disposition which results fr9m a struggle."(70)라고 처음 선언했다고 말한 후, 마르크스에 대한 이런 이해를 단순 확장해서 "There is conflict everywhere because there is production everywhere."(70)라고 부연한 뒤, "History is the battlefield of antagonistic productions, because everything is production."(70)라며, AO의 초반부를 인용한다(70-1). 오독과 단순화의 극치이자 전형-_-;
가족은 하나의 공장으로, 거기서는 '아빠-엄마-나'라는 모델이 각인된다. 그러나 이 모델(즉 오이디푸스)은 생산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추리이며, 이 와중에 종교와 신학의 내면화가 생산된다.
대변(represent)은 결코 성사될 수 없다. 소수자(minority)는 제 스스로 말해야만 하기에. 소수자가 중요하다면, 연민과 보호와 조력의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발언을 창조해내야만 하는 운명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자진해서 소수자가 되려 하겠는가? 소수자는 비자발적으로 만들어진다. "다수majorite는 권력과 지배의 상태를 전제하며, 그 역이 아니다."(MP 133) 소수자는 밀려난 자일 뿐 원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밀려나는가? 밀려남이 꼭 약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주인이 노예 도덕을 섬기는 사회에서는 노예가 아니려는 자, 주인 도덕을 살려는 자는 밀려나게 된다. 즉 순응하지 않는 것,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따라서 소수자에게 연민의 여지는 전혀 없다.
소수자의 마지막 과제는 제 목소리를 창조하는 일이다. 대변자는 없으며 불가능하다. 소수자는 소수자 되기 운동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멈추는 순간 순응 속에서 죽는 거다. 1984년의 윈스턴처럼. 살아남는다는 건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뜻이다. devenir minoritaire와 devenir revolutionnaire는, 즉 '소수자-되기' 내지 '소수자-생성'과 '혁명적-되기' 내지 '혁명-생성'은 왜 같은 생성일까? 양자는 생성의 동일성에서 만나며, 긍정과 창조만이 생성을 감당한다. 소수자의 의미와 도주의 의미는 이 지점에서 만난다. 불가피함과 비자발성. 생존과 칭조의 동시성과 동일성.
:: 이진경 류의 해석은 이런 점에서 나와 대척점에 있다. 그의 "카프카" 역주는 참고할 게 전혀 없을뿐더러 초심자에게 유독하기까지 하다.
들뢰즈: "내 생각에, 펠릭스 과타리와 나는 계속해서 마르크스주의자였는데, 아마 우리 둘 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지만, 둘 다 그러했다."(PP 171e) 여기서도 관건은 '정통성'과 '승인'을 둘러싼 지식-권력 투쟁이다.
"To remain a Marxist when those around you are denouncing Marxism as the philosophy of the gulag is a profoundly political act"(S. Choat 11)
"니체와 비교할 때, [정치적 급진성의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충분히 멀리 가지 않았다."(Simon Choat, 2009, 14) 의아할 수 있겠지만, 헤겔의 극복에서 N가 철저했다면, '모순' 및 '변증법'과 관련해 M의 태도는 복합적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잉규정되어 있고 차이적인 것이 모순이라는 점은 여전히 사실이며, 또한 총체성은 (...) 주요 모순 속에 적법하게 기반하고 있다."(DR 87e) 이는 A가 변증법에 너무나도 매여 있었기 때문.
'정치 영역/정치적인 것'과 '비정치 영역/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정치적 행위이다. 심지어 '경제가 최종 심급', '목구멍이 포도청'(먹고사니즘),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발언마저도 실은 고도의 정치적 실천이다.
DG가 강령(program)을 제시하지 않는 까닭은 강령이란 본디 경직성(rigid)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제시되는 것이 개념 내지 개념-도구로, 이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고 갱신하도록 한다(schizoanalysis). 네그리는 들뢰즈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소수-되기가 어떻게 실효적일 수 있을까? 저항이 어떻게 봉기가 될 수 있을까? 당신 저술을 읽다 보면, 이 물음들이 어떻게 답변될 수 있을지 늘 궁금하다. 내게 이 물음들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재정식화하게 강요하는 충동을 당신 작업에서 발견하긴 하지만."(PP 234) 들뢰즈&과타리를 향한 네그리의 의문은 미래 내지 목표가, 아니면 같은 말이지만 그리로 가는 길이 마련되지도 않았는데, 또는 성공의 보장, 아니 성공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없이, 어떤 종류의 실천이건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들뢰즈는 역사의 목적으로서의 대혁명(REVOLUTION)에서 변형의 선으로서의 혁명(revolution)으로 이행...단명의, 예측불가의, 중성적인 사건의 논리가 도래라는 총괄적 결정론적 목적론적 변증법을 대체."(E. Pellejero, 106)
도모와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한 실험과 창조의 차이는? 후자는 전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전자는 후자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의도 내지 지향의 역할은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 등.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다. 희망이란 부질없음, 종교, 미신이며, 따라서 절망의 동의어이다. 절망이란 니힐리즘, 즉 '무를 향한 의지, 하지 않으려 함'이기에. 따라서 절망의 참된 반대말은 실험, 도모 뭐 그런 것들이다.
우리에겐 욕망에 대한 불교식 착상이 익숙하다. 거의 욕심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되는.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동일한 언어를 쓰는가? 결국 어느 욕망관이 더 적합한가(adequat)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Jeremy Gilbert(2009), "Deleuzian politics? A survey and some suggestions", in New Formations, 2009, no. 68. 읽으면서 논평하기.
"분열분석의 틀 안에서는 그 어떤 정치 강령(programme)도 정교화될 수 없다."(AO 380e)는 DG의 발언에서 J. 길버트는 "도대체 '들뢰즈 정치학'이 가능할 수 있을까?"(J. Gilbert, 2009, 10)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강령'이 정치의 전제 조건이라는 '공리'가 전제되어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 강령이 선재해야 한다는 말.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론은 이런 전제를 파괴하는 데서 시작한다. 강령이야말로 정치의 적이라는 것.
"리좀"은 좋은 리좀과 나쁜 나무를 구별하기보다는 "모든 관계 집합들에 리좀적 차원과 나무적 차원을 설정"하기 때문에, "들뢰즈 작업의 정치적 원자가(valency)에 대한 궁극적 평가를 더 어렵게 만든다."(Gilbert 2009, 10-11) 나는 답한다. "리좀"에서 '리좀/나무'의 구분은 일종의 기계적 지표로, "안티 오이디푸스"의 '분열증/편집증'에 정확히 대응한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자본주의와 분열증' 1권(안티 오이디푸스)에서 2권(천 개의 고원) 사이에 변화는 없다.
J. Protevi(2009)는 '기쁜 정감(affect)'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리좀 편을 든다. 기쁜 정감이란, ‘새롭고 권력을 강화하는 만남들'(51)을 형성하도록 몸들의 포텐셜 권력을 증가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Gilbert, 12 재인용. joyous affect as that which increases the potential power of bodies, enabling them ‘to form new and potentially empowering encounters’.
"들뢰즈의 생명론적(vitalist) 존재론은, 삶의 권력들을 방어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하나의 배치체가 채용하는 입장(position)을 저항으로 정립한다(posit)(Delueze’s vitalist ontology posits resistance as the position which an assemblage adopts in order to defend and augment its powers of life.)" Véronique Bergen, "Résistances Philosophiques"(2009, 72), Gilbert 2009, 12 재인용. Bergen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삶의 권력(powers of life)'이라는 표현이다. 들뢰즈는 '삶의 권력/역량'의 증대를 기쁨이라고 했던가? '삶'이란 한정사는 왜 들어갔는가? 오히려 '실존(existence)' 내지 '존재' 아니었던가?
지금은 일반화된 가정인 "사회적 존재(내지 '동일성/정체성')의 형식들의 사회적 역사적 우발성"은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 '역사주의', '반-본질주의'로 불림. Gilbert, 13. D는 반-본질주의에 해당.
"진화론은 개체군이 부단한 변주(variation) 상태에 있으며, 각 개체는 다양한 변이체(variables)들 간의 상호작용들의 복합 집합의 소산이라고 이해한다." 델란다(M. DeLanda)와 관련하여, Gilbert, 15. "델란다도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주석가도, 은유 및 '의미화(signification)'라는 생각들에 대한 들뢰즈 자신의 명시적인 거부가 지닌 함의들을 적절하게 탐색한 적이 없다."(Gilbert, 2009, 16) 아마도!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기에.
소수(minorité)는 왜 '창조적 우월성(creative superiority)'을 갖는다고 가정될까? 이 가정의 맹목적 수용은 쉽고도 위험하다. 사실 소수에 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 이점에서 G. Silbertin-Blanc(2009)이 중요. 정상성으로서의 '인간(Man)' vs. 아이, 동물, 여성. 이 대립에서 여성만을 떼어내는 것은 무리. 이 역시도 그램분자적(molar) 관점에 불과. 분자적 층위에서 성, 성욕, 욕망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 "모든 정치는 미시정치인 동시에 거시정치이다."(MP 213e) 들뢰즈의 미시정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사실을 잊곤 한다. 찬성자건 반대자건 간에.
푸코는 저 유명한 "안티 오이디푸스" 영억판 서문에서, 그 책의 커다란 세 적을 제시하는데,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욕망의 서툰 기술자들 -정신분석가들과 기호학자들', '파시즘'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비-파시즘적 삶의 입문서'로 묘사한다. "그 책의 일차적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국가이며, 그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이는 것은 -그것들의 역사, 현재 형태들, 내재적 역학에 대한 적합한 서술과 분석을 위한 개념들을 발명하려는 시도이다."(Gilbert 24) Gilbert의 이런 주장은 푸코가 들뢰즈의 어떤 점들을 "경시(downplay)"한다는 주장에 이어 등장하는데(24), 우선 '파시즘'과 '자본주의와 국가'가 not ~ but의 관계인지 not only ~ but also의 관계인지부터 밝혀야 한다. Gilbert는 파시즘을 "자본주의 국가 구성체의 유형학 내의 상대적으로 특화된 한 변종"(24)으로 보며, 현대는 "들뢰즈&과타리가 아직 충분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 유형의 구성체(25)를 낳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 예로 블레어의 신자유주의는 공리의 축소를 보임. 공리의 축소는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특징으로 '공리들의 배가'가 특징인 '사회민주주의'와 상반된다는 것이 G의 논거(25). 비판: 블레어 또는 신자유주의가 사회민주주의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주의 아닐까? 먼저 답해야 하며, 계속 논의해야!
"냉전 및 동유럽 '현존 사회주의'의 종말은 DG의 구도들의 몇몇 개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출현을 표시했다."(Gilbert 25) 이 개정의 핵심이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논평: 자율주의 경향의 해석이 DG의 확장? 퇴행?
"의문의 여지 없이 자유주의 전통에서, 관행과 전통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이며, 개인은 권리, 자유, 소유물의 담지자이다. 또한 의문의 여지 없이,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개인은 가장 문제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다."(Gilbert, 28) "스피노자, 니체, 마르크스를 관통하는 행워자(agency)에 대한 어려운 이해" - 이는 "집단 또는 개인의 의지, 결정, 선택에 대한 그 어떤 영웅적 이해도 문제시"하며, "어떤 형태의 자유주의와도 분명히 양립 불가능"(Gilbert, 28) 행위자의 문제와 관련해서 DG가 언급(QP 60e)한 '스피노자적 유물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상통. W. Connolly(2002), Neuropolitics: Thinking, Culture, Speed 참조. - Gilbert 28-9.
DG 생태학 주요 문헌. B. Herzogenrath(편), D, G and Ecology, 2009. An [Un]Likely Alliance: Thinking Environment[s] with D/G, 2008. 과타리 "세 생태학". 라투르.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1843, MEW I, 293)에서 차이 개념을 논하면서 진정한 차이, '본질의 차이'는 '북과 남',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극과 무극', '인간적 성과 비인간적 성'이라고 말한다. "Wahre wirkliche Extreme wären Pol und Nichtpol, menschliches und unmenschliches Geschlecht."(Kritik des Hegelschen Staatsrechts, MWE I 293) 보통 'das menschliches Geschlecht'는 '인류'를 뜻하나 M가 '인류'와 '비인류'를 구분, 거기에 '본질의 차이, 두 본질의 차이(ein Unterschied der Wesen, zweier Wesen)'를 두었다 보긴 어렵다. DG가 주목한 것은, M가 애초부터 상식적인 의미의 '인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리라. 비인간주의는 M의 학위논문("D와 E 차이", 1841)부터 보이는 현상이며, "1844년 경철초고"나 "독일 이데올로기"(1845~6)에서도 잘 드러난다. D는 NP(1962) 초반부터 M의 학위논문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M와 니체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암튼, M의 비인간주의는 AO 1장에서 종합되고 MP 셋째 고원에서 정점에 이르는 존재론의 초석 중 하나다. +스피노자, 니체. S, M, N 이 셋의 공통점은 인간적 의지의 절대적 부정인데, 이는 신의 절대적 부정이란 모습으로 표출된다(무신론, 종교 비판, 자연주의 내지 유물론/물질주의). 여기어 DG를 따라 비인간주의를 추가해야 하리라.
내년 봄 중국에서의 들뢰즈 학술대회에서 "Deleuze, Marx and Non-human Sex"라는 제목으로 들뢰즈의 존재론을 발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조금 전에 들었다. 채택될 수 있으려나?
안녕하세요, 잰형? 비인간(중심)주의 적극 찬성이오!! ^^ 푸코도 이 인간(중심)주의와 변증법을 비판하면서, 소위 정통 맑스주의에 일침을 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구표 선생의 논문, 마르크스와 근대성, 2009)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의 입장에서 헤겔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초기(1954) 텍스트로, L'île déserte 20쪽이하의 Jean Hyppolite, Logique et Existence에 대해서 잰형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 내년 봄에 중국에서 뵐 수 있으려나 했는데... 저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너무 멀어요.... 흑흑~
모쪼록 건강하시길...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겁을 먹고(?), 아무도 시작하지 않을 수 있기에 먼저 한 마디 합니다. (이하 존칭 생략.)
들뢰즈 철학이 처음으로 정리되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 와서이다. 물론 그 전에도 좋은 책들은 많다. 하지만 그의 존재론이 (가타리의 도움과 함께) 처음으로 정리되는 것은, 말하자면 '결속/고름(consistance)'을 얻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 와서다. 가령 그는 "차이와 반복"(1968)은 물론 "의미의 논리"(1969)에서 개진한 '종합' 이론을 거의 폐기하고, 완전히 새롭게 해체해서 제시한다. 들뢰즈의 철학에 하나의 '인식학적 절단(coupure epistemologique)'이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것에서 드디어 이탈하여 새로운 이정표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꼽아야 한다. 이 책은 그 전후 10년의 작업의 이정표이며, "천 개의 고원"(1980)에서 일단 한 숨 쉬어 가는 정거장을 만들면서 일단락된다. 따라서 일단 "차이와 반복" 및 "의미의 논리"를 통해 '종합'의 이론을 '학습'하려는 사람이라면 당장 그만두는 것이 좋다. 들뢰즈의 '종합' 이론의 발생사를 연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