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의 이전의 존재
밑도 긑도 없는 캄캄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khainein 있다khaos. 아가리 속에서 어떤 떨림을 느낀다. 그러나 뱉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뿌욤한aether 빛 한 줄기photon 보이지 않는 아가리 속은 시간마저 삼키고 있어arkhe 소리 한 점vox 새지 않았다. 아가리 주위로 외롭고 쓸쓸한 밤nyx이 얼만큼 오래 머문 것인지 까닭도 없다. 까닭도 없이, 다른 하나가 태어나기 전의 모든 하나를 캄캄한 밤의 형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끝없는 은 아니다. 아예 없음은 형식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홀로 있어 크기도 없고, 크기가 없으므로 자리매김도 없고, 자리매김이 없으므로 처음과 끝이 없는 흐름 끊긴 아가리 속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캄캄한 밤과 함께 굳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모든 하나는 터무니없다. 까닭없이 생겼으나 그림자라도 있어야 스스로 드러난다. 그림자조차 없는 그것은 힘만이 가득 찬 헤아릴 수 없는 아가리 속이었다. 무늬도 바탕도 모두 지워진 밤의 아가리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린 듯하다. 찰나였고, 여전히 까닭없는 밤이었으므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차라리 아가리 속에 갇혀 있던 다스릴 수 없는 힘의 분노였다. 한 번의 외침이 있자, 아가리 속 여기저기서 아가리를 찢으며 바깥으로 달아나는 힘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아가리를 찢은 힘은 알갱이가 되고 수많은 먼지가 되었다. 먼지는 먼지들과 부딪히며 타오르고 아가리 속은 점점 환해졌다. 타오르며 빛을 내는 먼지들로 아직 뭉치지 못한 수많은 먼지들이 드러났다. 뭉쳐지지 않는 알갱이는 타오르는 식은 재에 갇혔다. 캄캄하던 밤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얼룩이 번지고 있다. 캄캄한 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늬들을 만들고 있다. 빛이 어둠을 불러 오고, 어둠이 빛을 찾아갈 수 있다면 서로 떨어진 아가리의 겉과 속은 보기 좋게 한몸을 이루는 안과 밖이 된다. 먼지는 한몸의 아름다움을 쫓아 안팎을 떠돌며 서로 다른 모습들을 만든다. 먼지의 부딪힘과 축축하게 식은 재와 그 속에서 서로를 잡아당기게 하는 힘을 가진 알갱이(힘의 실천적 형식인 입자)만 있다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었다. 흩어진 재에서 빠져 나온 힘의 알갱이는 머물던 재의 모습을 찾아 아직 뭉치지 않은 먼지(원자) 사이를 떠돈다(힘의 의지적 형식인 편자: 에피쿠로스의 편자는 차후 힉스 입자와 함께 상세하게 다뤄질 것임). 그리고 먼지와 먼지의 모습들이 나름의 자리를 잡자, 너와 나의 거리 곧 시간이 생겼다. 마주한 시간 가득 수많은 얼룩이 아롱져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고 있다. 머잖아 아름다운 무늬들의 시간을 자리매김하는 의식의 주관자도 생겨나리라. 그러나 그 전에 오롯이 흩어지지 못한 아가리 속 끈적한 외침들은 무거운 숨결과 가벼운 숨결로 나뉘어 여기저기로 고여 든다. 어떤 먼지는 무겁게 가라앉아 뭉쳐지고 어떤 먼지는 너무나 가벼워서 끝없이 솟구치는 듯하다. 힘은 다스림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서 힘과 한몸이 된 낱낱의 먼지들은 처음 한몸이었던 고요한 아가리 속을 그리워 한다. 낱낱의 먼지들이 펼치는 모습은 힘의 움직임과는 달리 흔들림 없이 아득하게 멈추고 싶어, 힘을 억누르려 더욱 무겁게 뭉친다. 그러면 힘은 뭉쳐진 먼지 속에서도 바깥에서와 같이 솟구치고 가라앉아 뭉쳐진 먼지와 맞선다. 뜨거운 숨결은 먼지의 바깥에서 짖누르고, 가둬진 힘들은 먼지 속에서 거세게 맞선다. 아프게 찔리고 세차게 부딪혀 고요한 날이 없다. 아가리를 닮은 먼지의 그리움이 그러하듯 먼지를 닮은 상처들은 뭔가 끈적한 가운데 먼지의 곡두들을 만든다. 함께 아가리의 숨결로 머물렀으나 빠져 나와 이리저리 떠돌던 한숨(산소)은 어디에나 머문 아가리의 숨결(수소)과 덩어리를 이루어 곡두들을 감싼다. 곡두들이 춤을 춘다. 춤의 곡두 가운데서 상처는 먼지의 부스럼을 남긴다. 먼지의 부스러기는 그러나 먼지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상처가 상처를 낳고 상처가 상처를 감싸며 먼지는 수많은 곡두에 휩싸인 부스러기들을 제 품에 담는다. 부스러기 가운데 파래와 이끼가 먼저 있었고, 그 위를 맴돌던 독룡과 맹수의 시간도 아득하다.
하얗게 언땅 위로 묵직한 저음의 울부짖음이 들렸고 이어 숨죽인 디딤발 소리가 보인다. 걸음걸이는 어찌나 고요한지 도리어 그 침묵의 소리에 언땅이 갈라지는 듯하다. 몸가죽은 황토보다 짙고, 오래된 고목과도 같은 검은 털이 여러겹의 줄무늬를 드리웠다. 털끝으로 공간을 다스리며 걸음마다 매화꽃 발자국을 남긴다. 까마귀 몇 마리 침엽수 가지 끝에 앉아 무언가를 재촉하며 따갑게 운다. 짐승은 다만 등뼈를 곧추세우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 걸음 멈춘 몸체는 작은 움직임도 없다. 이윽고 짐승의 발자국을 온몸에 찍은 듯한 매화 무늬의 여린 몸체 하나가 무언가에 놀라 힘껏 땅을 밀어 달아나자 짐승은 땅을 힘껏 잡아당겨 쫓는다. 언땅이 녹고 땅이 누런 제 몸빛을 되찾자 말라비틀어진 매화 무늬 가죽 사이로 수천 수백의 구데기 떼가 드러난다. 주검을 뒤로 하고 짐승은 벌써 하얗게 언땅 저편으로 한 점 수묵 되어 사라졌다. 짐승의 털가죽을 걸친 한 무리가 사라진 짐승을 쫓고 있다. 결 좋이 쪼개진 검은 돌로 끝을 엮은 창을 들고 무리는 짐승의 발자국이 끝난 동굴 앞에 다다랐다. 칠일 밤낮을 젖먹이 새끼들과 함께 한 짐승이 동굴 밖을 나서자 흡사 그 만큼의 밤낮을 쫓아 온 무리가 창끝으로 찌른다. 짐승은 무리 가운데 맨 앞의 하나를 앞발로 찢고, 그 뒤의 하나를 날카로운 이빨로 뜯는다. 그러나 짐승은 결국 죽는다. 한 무리는 짐승의 가죽을 가지게 될 아무개를 가렸고, 가죽을 벗기기에 앞서 주검을 한데 모아 나뭇잎과 가지들로 덮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세계
짐승의 가죽을 걸친 아무개가 무리와 함께 동굴로 들어서자 동굴 속 무리들이 달려들어 매만진다. 동굴 벽 여기저기에 짐승의 무늬와도 같은 긁고 새긴 자국들이 뚜렷하다. 뚜렷한 자국들을 흉내 내어 무리 가운데 하나가 이번에는 동굴 바닥에 무늬를 새긴다. 까닭없는 그 짓을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무리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 속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간혹 무리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지만 이내 머리를 튼다. 무리의 눈 속을 아무도 들여다 본 일 없고, 어디에도 무리의 얼굴은 없다. 무리가 거듭하는 일은 사냥과 번식과 깊은 잠뿐이다. 대지는 아직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리에게 있어 사냥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삶 그대로였다. 사냥의 부정적 매개인 사냥 도구와 기술이 지닌 권력은 아직 드러난 바 없다. 단지 하나보다는 여럿이 뭉치고 사냥하는 것이 무리를 오래도록 살게 하였다. 무리의 어미 아비가 주먹돌로 딱딱한 껍질 속 열매를 깨어 먹을 무렵부터 그렇게 무리는 무리 지어 살았다. 그러나 돌을 쪼개어 짐승을 사냥할 무렵에는 몸체의 크기와 힘의 세기로 드러나는 짐승의 위계는 아무 소용 없었다. 사냥 도구를 지닌 힘이 약한 아무개들은 어미 아비 때와 달리 무리 지어 힘센 아무개를 공격했다. 힘이 약한 여럿의 아무개들이 무리에거 쫓겨나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무리의 나날들 여느 때와 같이 암컷 무리가 동시에 거부하는 수컷 아무개는, 수컷 무리 아무개들이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와 함께 번번이 생겨났다. 암컷 무리에게 버림받은 수컷 아무개는 암컷 무리의 따돌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무리를 떠나지도 버림받은 암컷을 찾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몇몇의 암수를 뺀 무리는 짝을 바꿔 수시로 성기를 맞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굴 속은 무리의 기쁨이 땀범벅 된 야릇한 냄새가 떠나지를 않았다.* 무리는 그 냄새가 짐승의 피냄새보다 좋았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은 무리 모두의 몫이었으므로 제 뱃속으로 낳은 새끼를 따로이 챙기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보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암수 몇몇을 무리가 거부한 것처럼, 무슨 까닭에서인지 근친끼리의 흘레는 드물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먹어서는 안 될 열매를 가리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비가 온다il pleut, 밤이다il fait nuit.* 피에 굶주린 사냥꾼의 시간은 잠들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태초의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의 몸체들로 동굴 속 이곳저곳은 그늘 속 빛띠처럼 부시다. 어느 몸체의 어울림이 아름다울까, 어느 몸체의 울림이 먹구름 저편 별자리에 닿을까, 동굴 속 아득히 백치들의 보석같은 질투가 숨죽인 별빛보다 밝게 타오른다. 긴 밤으로 타오른 불꽃의 따스함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면 이제는 젖달라 보채는 새끼들의 울음소리로 동굴 속은 다시 한 번 소란 속이다. 갓난새끼들 또한 저마다 달라서 자주 보채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쉽게 다룰 수 있는 무리도 있다. 물론 제법 자라서도 젖을 떼지 못하고 수시로 보채는 별난 새끼들도 간혹 눈에 띈다. 무리의 어미 아비들은 새끼들 아무개 하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뭔가 달라 보이고 따돌리게 되는 아무개도 무리에게는 쓰임새가 있었다. 암컷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수컷 아무개는 동굴 벽에 짐승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잦았다. 짐승의 무늬는 무리가 보기에 좋았다. 수컷이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는 사냥 도구인 창 끝에 돌칼을 잘 엮었다. 무리는 무리의 아무개들을 똑같이 귀하게 다루었다. 무리의 한 몸체를 위해 아무개의 몸체는 힘껏 움직였다. 무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뜻하지도 않았으나, 아무개의 자그마한 움직임은 곧 무리의 몸체가 움직이는 듯한 큰 힘을 펼쳤다. 3만 5천년 전 그 때를 우리는 도구적 구석기라 부른다. 도구의 단순 사용을 넘어, 도구를 만들고 부려 낳아준 자연과 맞서던 시기였다. 몸체는 저를 낳은 아가리 속보다 오히려 깊고 복잡하다. 몸체의 탄생은 모든 존재와 존재자의 시간을 원점으로 되돌려 초토화 시킨다. 몸체는 수많은 세계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세계와 만나고 합성하며 다양한 기계를 생산한다. 저기 하늘나라의 유령에게 홀린 21세기의 근엄한 현자와 교부의 자손들이 꿈에서도 짐작 못한 몸체의 놀라운 광경이 벌써부터 펼쳐지고 있다. 보라. 야생의 보리밭에 희한하게 솟은 오동나무와 은사시나무 언덕 사이를 살펴 은사시나무 언덕 너머 너도밤나무 숲까지의 거리를 재고 보리밭의 일렁임과는 다른 숲의 움직임을 헤아리는 특별한 몸체의 관측 기계를. 암컷 무리의 생산적 몸체가 펼치는 보리방아 찧기와 가죽과 대를 엮어 의복과 이부자리를 짜는 정교한 직조 기계를. 수컷 무리는 날 선 창끝으로 떼를 지어 위협적인 자연의 거대한 몸체를 매끄럽게 절단한다.* 파괴와 척살 기계로 간교한 아무것도 목적하지 않은 채 스스로 도달하는 몸체의 자기 실현을 위한 자기 해체. 이제 무리는 점점 더 자기 파괴의 몰입으로 치닫는다. 더 큰 몸체인 자연과의 전쟁, 낱낱이 분열된 몸체의 자기 파괴적인 내부의 전쟁, 몸체는 분열된 자기 배반의 씨앗을 뿌려서라도 몸체의 드러남이라는 자기 확립의 최후를 결단코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최후는 쓸쓸하지 않다. 모든 존재(곧 실체)와 하나의 몸체를 이룬 주체는 비로소 최후의 평화에 몰입할 것이니. 천천히 존재 이전의 몸체에 깊이 몸 담그자. 팔을 내리고, 겸손한 그의 욕망을 따라. 성급한 욕망은 백 년이 흘러서야 겸손한 그 곳에 닿는다. 그러므로 서두르자.
몸체의 탄생
-몸체, 김재인을 따라서 나는 그를 존재의 일의적 내용 전부라고 말한다. (김재인의 몸체론, 김재현, 2027, 철학과 문화론.)
오늘도 밧데리 맡겨 놓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이 댓글을 포함해 위의 댓글은 지워 주십시오. 김재인의 철학사는 지금 여기는 아니더라도, 나중 거기서라도 반드시 봐줄 사람이 늘어날 것임을 알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곧 배나갈 것 같습니다. 제주는 다시 가기 싫고, 통영에도 슬슬 갈치가 비친다네요. 이번엔 정말 가니 마니가 아니라, 저도 사는게 무척 어려운 놈입니다. 어머니 모실 아담한 집은커녕 반전세집 세금도 감당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하루이틀에 끝날 일 아닙니다. 종이책이 없어지든 핵폭발로 인터넷이 사라지든 말든 김재인의 철학사는 반드시 살아 남아, 논리를 가장한 터무니없은 개새끼들의 미신을 반드시 박살내고 말겠습니다. 이어령 따위의 반박 정도는 눈 감가도 헤아립니다. 오래 산다고 대가리 트이는 게 아닙니다. 반면 저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다 산 어른들께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른들은 대개 무엇이 어떻다고도 않고 무엇이 옳다고는 않습니다. 그가 젊을 때 죄인이든 말든 침묵하며 상대를 헤아리는 자체만으로도 상대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듭니다. 반면 늘 배운 놈들이 추한 꼴로 인생 마무리합니다. 다 늙은 새끼가 자지도 안 서고 이제 오갈때도 없어 예수니 천국이니 하면서 세상 천지 화려한 곳은 아니 기웃거리는 데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동년배들이 주책 노방이라고 손가락질 할 겁니다. 문학이니 예술 따위가 아무리 고상해도 제대로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힙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오히려 문학 예술, 정신 영성 운운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저는 병자인 들뢰즈가 자살한 것을 백번 더 이해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형제들과도 소원해질 제가 지금처럼 가진 돈도 없다면 저는 반드시 중병 들기 전에 자살할 것입니다. 그게 후세에게도 자그마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전에 꼴리는 대로 맘껏 살 테니 너무 염려는 마시고, 아무튼 나이 들어까지 지가 아니면 세상 곧 망할 것처럼 구는 새끼들만 존중할 것이 아니라 저처럼 개같은 어린노묵새끼도 제발 좀 헤아려 주십시오. 후
윤구병의 존재론과 위의 글은 "사실" 아무것도 상관없다.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비롯한다, 는 것 말고는.
박창업은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인 모양인데, 국립 서울대 교수의 깊이가 내쇼날-지오그라픽보다 못한가 싶어 잠시잠깐 관심 가졌다. 물론 위의 글 어디와도 아무 상관 없다.
강영계의 스피노자는 국어 천재라도 읽기가 쉽지 않다. 원전 운운 말고 차라리 박기순의 들뢰즈 스피노자를 읽으면 흥미는 있어 텍스트를 더 오래 붙잡게 될 것이다.
매화록은 25만 년 전에 개체 분화한 범시베리아 역권의 일반적 사슴종이다. 나는 원래가 사기꾼이니, 내가 철학한다고 믿지 않듯, 철학 또한 너무 믿지 마라. 김재인은 원래가 서울대 생물학과 들어갔다 미학하고 철학한 이상한 사람인데, 그나마 250만 년 어쩌고 했을 때 사기라고 알아봤던 사람은 철학자 김재인 뿐이라고 본다. 철학자를 대할 때, 아무리 요즘 철학이 우습게 보여도 철학자들은 우습게 보지 마라: 36년 전에, 일찍이 사내로, 인간으로 분화하지 못한 아무것도 아닌 나같은 사내도 있으므로, 그런 자들이 의지하는 철학을 결혼이니 직업이니에 인생 바치다 심심풀이로 덤비려는 애들은 조심해서 나서거라.
*선생님 언젠가 제 글을 보는 인간들이 제로일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김재인의 철학사는 계속 됩니다. 아무튼 점점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제 글을 저작권 보호 해주십시오. 언젠가 채팅할 때 자칭 타칭 문학한다는 년놈들이 개밥풀보다 못한 글자 따위로 -베낀다는 말이 뭡니까?- 도용? 한다고 깨방정 뜨는 걸 봤는데, 우습지도 않은 < 은> 하는 말없음의 토씨 적용은 제 특허입니다. 아무튼 저의 개 좆같은 글이 언젠가 서양철학사보다 더 잘 읽혀질 때가 올 것이고, 그것은 오직 선생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름도 돈도 안 되는 이 짓에 있어, 저작권은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저는 조중동 안 본 지 수 해가 넘었습니다. 조중동 어떻고 하기 전에 안 보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나의 글이 어떤 년놈들에게는 조중동이 될지언정, 오히려 철저하게 그들을 배척하고 싶단 겁니다. 저는 예수새끼도 이어령이같은 인간 이하와 엮어 사는 이 시대가 혐오스럽습디만, 선생님과 동시대에 머문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저의 서툰 말씀 언제나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저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일수록 싫고 좋음은 분명해야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김재인의 철학사는 그 모든 철학사보다 잘 읽힐 때가 올 것입니다. 자지도 안 서고 인간 구실도 못하는 오늘의 사마천보다 더 위대한 김재인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저기서 고미숙이가 웃는군요. 여자는 거들떠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이웃에서 강유원 선생이 혀를 차면 헤겔을 다시 보면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죽을 때까지 김재인의 철학사를 생의 목적 삼는 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재범의 팬이 되겠다고 맹서한 소녀처럼. 그건 개인의 정신병이 아니라, 반드시 시대의 병폐입니다. 동시대의 정신병자로써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그런데 이렇게 장담하면 가치의 문제가 주어지는 것 같은 데, 우리가 정작 무시하지 못한, 지 어머애비의 이명박 추종, 대한민국 자본 추종, 어떻게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개같은 이념이 주어지겠죠. 스승님. 저도 스승님의 이름뿐인 혁명 비판에 대한 주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안젤리나 졸리와 동급인 고소영을 말하는 정도의 사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원하는 건 국내적으로 이름난 자들의 행로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저 신기하고도 신기한 유렵의 풍토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김제동이도 김미화도 유인촌이 이순재와 똑같다고 여깁니다. 짐작하기로 김제동이보다 유인촌이가 먼저 죽을 것이고, 언젠가 김제동이가 문화부 장관할 날도 오겠죠. 김제동이도 보아 하니 정치적인 놈입니다. 정치 좋아하는 선생님께서 보기엔 마뜩하겠습니다만, 저는 다같이 우습게 보입니다. (김제동이 영신고 나왔다는 데, 74년 내 또래인 줄 알았는 데, 대구중 출신의 한 해 선배에게 물어 보니 제 또래라는군요. 아무튼 대구새끼인 나는 대구새끼들이 싫습니다.)
음악도 싫고, 예술도 싫어했던 제가 문학인들을 그토록 혐오하며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독자성의 소통없음이 언젠가는 소통할 날을 기대하며, 그때까지 아무튼 자본의 개새끼들이 나를 모방하지 않게 단속해 주신다면, 핵폭발 이후의 그날에는 들뢰즈와 선생님과 저만이 유일한 교과서인 날도 올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시어, 아침놀에게는 강유원의 헤겔도 읽어 보길 권하십시오. 당신은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뿐인 제자의 바람입니다. 이토록 비장하게 '김재인의 철학사' 는 계속 될 것입니다.